[그때그현장]왜장의 포로가 日불교계 큰 별로

[그때그현장]왜장의 포로가 日불교계 큰 별로

25.임진왜란과 余大男(上)

  • 승인 2008-01-08 00:00
  • 신문게재 2008-01-09 10면
  • 안영진 중도일보 煎 주필안영진 중도일보 煎 주필
어린시절 시문학 능하고 총명… 적장의 총애
불가에 귀의, 29세에 혼묘지 3대주지로 임명
1659년 79세로 죽을때까지 귀국의 꿈 못이뤄
계룡장학재단 연구 끝 여씨문중서 제례 올려


▲ 余大男이 3대 주지로 있던 본묘사(本妙寺).
▲ 余大男이 3대 주지로 있던 본묘사(本妙寺).
지난해 12월 상순, ‘계룡장학재단’ 해외문화연구팀은 ‘구마모토’ 일대를 답사한바 있는데 그 곳(九州)은 백제영향을 받은 유적이 산재해 있는 곳이다. 예를 들면 ‘미야자키(宮崎)’의 〈백제마을〉이라던가. ‘기쿠스이(菊水町)’의 ‘후나야마(船山)’고분, ‘기쿠치성(菊智城)’, ‘다자이후’의 백제성곽 등 다양하다.

우리 탐사팀은 첫날 ‘기쿠치’ 관광호텔에 여장을 풀고 인근에 있는 〈명치유신〉 직후의 ‘세이난노에키(西南の役)’격전지를 살펴봤다. 이곳은 관군과 ‘사이고오(西鄕隆盛)’가 이끄는 반군이 혈투 끝에 4000명의 전사자를 내고 반군은 여기서 대패, 종말을 고했다.

이곳에서 관군은 대승을 거뒀지만 망신을 당한 건 강골로 이름난 관군의 ‘노기(乃木希典)’는 군기(軍旗)를 ‘사이고오’군에게 빼앗기자 할복 직전 명치(明治)천황의 사면으로 풀려났다. 훗날 〈노기〉는 일 · 러 전쟁 때 만주의 여순 ‘203’ 고지 대회전(大會戰)에서 러시아군의 항복을 받아냈지만 〈노기〉 사령관도 많은 장병을 잃었다.

이 전투에서 〈노기〉는 ‘가즈스케(勝典)’, ‘야스스케(安典)’ 두 아들을 최전방에 투입, 전사시킨 독종(?)이지만 개선장군인 그가 도쿄 역에 내리자 시민들은 그를 향해 돌팔매질을 했다. 그 이유는 휘하장병을 너무 많이 희생시켰다는 항의표시에 다름 아니었다. 그는 ‘냉혈’이라 할 만큼 자녀교육에 있어서도 엄격했고 청빈하게 살다간 군인으로 평가를 받아왔다.

한 번은 ‘학습원’에 다니는 큰 아들놈이 눈물을 훔치며 점심시간에 집으로 돌아온 일이 있는데 그 까닭은 이러했다. 귀족들 자녀는 기름진 도시락을 펴놓고 먹는데 〈노기〉의 아들만은 꽁보리밥에 대가리만 크고 뼈대만 앙상한 ‘망둥이’ 도시락을 보고 또래들이 “야! 무슨 고기가 저러냐?”고 놀려댔던 것이다.

그 바람에 도시락을 그냥 싸들고 집에 돌아왔다가 〈군인의 아들이 보리밥이면 족하지!〉하고 호통 칠 정도로 엄격한 가정교육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훗날 〈노기〉장군은 명치천황이 사망하자 빈소를 다녀와서 전례 없이 부인 ‘시즈코(靜子)’를 향해 사진을 찍자고 했다.

사진기사가 〈좀 더 어깨를 붙이시지요. 각하!〉하자 〈그러지!〉하고 포즈를 취하고는 〈사진엔 목소리도 찍히는가?〉하고 농담까지 흘리는 여유를 보였다. 그는 이어 거실에 들어가 〈폐하를 따라 나는 갑니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할복을 하자 부인도 〈남편을 따라갑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동반자살을 했다. 이렇게 ‘노기’가문은 대가 끊겼는데 우리로선 듣기에 등골이 오싹해지는 내용이다.

일인들은 육군엔 ‘노기’대장, 해군엔 ‘도오고(東鄕平八郞)’ 제독이 있다며 군신(軍神)으로 떠받고 있는데 필자는 유년시절 〈노기장군〉 전기를 밤새워 읽은 기억이 생생한데 그 전기의 마지막 구절이 인상적이었다. 〈노기〉부처가 이렇게 죽자 〈마구간에선 주인을 잃은 애마(愛馬)가 북풍에 머리털을 내저으며 히히잉! 히히잉! 흐느낀다.〉라고 적혀 있다.

총사령관이 두 아들을 최전방에 투입, 모두 전사시키다니…. 굳이 비교할 일은 아니지만 6 · 25 전쟁, 월남전에서 우리 측 사령관이나 고위층 자녀 전사자가 얼마나 되는가를 생각게 하는 대목이다.

‘기구치성(菊智城)’이야기
우리 일행은 다음날 ‘기구치’성을 돌아봤다. 필자는 70년대부터 세 차례를 답사한 바 있지만 그때는 밋밋한 언덕에 갖가지 설화만 무성할 뿐 그리 실감나는 곳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번에 돌아본 ‘기쿠치성’은 말끔히 복원되어 깊은 인상을 풍기는데 이 성은 그들이 오랜 세월 연구해왔음에도 그간엔 수수께끼의 성으로 되어 있었다.

성곽에 대해 관심이 큰 일인들은 ‘에토(江戶)성’, ‘나고야(名古屋)성’, ‘히메지(姬路)성’, ‘구마모토(熊本)성’, ‘오사카(大阪)성’ 등을 보란 듯이 가꿔놓고 자랑한다. 그러나 ‘기쿠치성’만은 색다른 구조를 지녔다 해서 학계에서도 갑론을박(甲論乙駁) 논쟁을 거듭해왔으며 일본에는 석성(石城)이 대부분이어서 토성은 찾아보기 힘든다.

‘에토성’, ‘오사카성’, ‘구마모토’성은 평지(平地)성으로 거기엔 호리(屈)를 파고 물을 담아놓아 ‘난공불락’의 요새라 자랑하는데, 그러나 유독 ‘기쿠치’성만은 밋밋한 구릉(언덕)에 흙으로 쌓아놓은 별난 것으로 연구결과 백제인의 지휘아래 축조한 ‘병참기지’로 판명되었다. 이 성에 대해 필자로선 잊지 못할 기억을 갖고 있다.

한 · 일 학술세미나 때 제1차는 대전에서 2차는 ‘구마모토’에서 개최한 바 있다. 이때 필자는 〈한 · 일 밀월(蜜月)시대의 제반문제〉를 다뤄 그런대로 넘겼지만 우리 측 발표자가 〈기쿠치성의 성격〉을 놓고 백제인이 건너와 축조한 방어용 ‘성’이라 단정하는 바람에 문제를 일으켰다. 주제논문을 미리 배포한 탓에 많은 참석자가 읽었던 모양으로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세미나에서 반론 같은 건 흔히 있는 일이지만 당시 안팎정서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때였다. 우리로선 원정(渡日)행사가 처음인데다 80년대 초만 해도 일본엔 조총련(朝總聯)이 극성을 부릴 때가 되어 만약 소란을 벌이거나 반론의 도가 지나쳐 문제가 생긴다면 귀국 후 궁지에 몰릴 공산이 있다. 때문에 이를 추진한 필자로선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이때 필자는 ‘파트너’인 일본 측 대표 ‘히라노(平野敏也)’ 논설위원장에게 토론자는 온건파 3~4인으로 묶어 줄 것을 요청, 가까스로 타고 넘었다. 예상대로 단하에선 〈나도! 나도!〉 다투어 손을 들며 발언권을 달라는 걸 차단해린 것이다. 우리 측 발표자도 낌새를 알아차리고 〈안 선생! 몰매를 맞을 각오로 허리띠를 졸라매고 마이크를 잡습니다.〉이렇듯 긴장하고 있었다.

행사를 마치고 그곳 재야 사학자들은 기어코 우리 측 발표자를 데리고 현지에 가서 갖가지 질문을 던졌던 모양이다. 그 후 필자는 그 교수에게 ‘기쿠치’성을 몇 번이나 답사했느냐고 묻자 그는 겸연쩍은 듯 이렇게 나왔다. 〈미안하지만 가본 일이 없어요!〉라고 실토하는 게 아니던가.

本妙寺에 얽힌 기막힌 사연
‘혼묘지(本妙寺)’에 묻혀 있는 ‘여대남’을 한국에 소개한 것은 계룡장학재단(회장 李麟求)이었다. 80년대 초 그곳을 돌아본 이 회장은 수년 후 ‘장학재단’ 부설 ‘해외문화탐사팀’을 발족, 본격적인 연구를 펼친 끝에 여씨(余氏) 문중과 연결시켜 제례(祭禮)를 올리는 극적인 장면을 연출한 바 있다. 그것은 400년만의 문중 후예들과의 해후(邂逅)였다. 임난(壬辰亂) 때 갈라진 이산(離散)의 한을 푸는 계기였다.

그럼 ‘여대남’은 어떤 인물이며 어떻게 일본 승려가 되었는가. 여대남의 운명은 ‘임진란’이 몰고 온 뼈저린 산물에 다름 아니며 그는 ‘경남 하동군 양포면 박달리’, ‘여천갑’의 아들로 태어나 13세 때 ‘임진란’을 맞아 ‘가토(加藤)’에게 붙들려 규슈로 압송되는 신세가 되어 끝내 귀환을 못했다.

그의 생부 ‘여천갑(余天甲)’은 왜군에게 끌려갔다가 무사히 돌아왔으나 ‘보현암(普賢菴)’에서 글공부를 하던 余大男은 왜군 ‘다카하시(高橋三九)’에게 붙잡혀 왜장 〈가토〉 앞에 끌려가 혹독한 심문을 받는다. 어린 余大男은 그때 종이와 붓을 달라 해서 당(唐)나라 시인 두목(杜牧 - 中唐때의 사람)의 산행시를 써서 바치니 ‘가토’가 그를 보고 〈이 아이는 범상한 아이가 아니다〉라며 자기 곁에 두고 보살폈다.

그 후 일본 ‘히고(肥後)’지방으로 압송되어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라는 명을 받고 변신을 하기에 이른다. ‘여대남’이 ‘가토’에게 잡혀 있을 무렵, 그의 측근에는 ‘日眞’이라는 승려가 있었는데 그는 ‘사명대사(四溟大師)’와 울산(蔚山)에서 평화를 의론한 인물이기도 했다. 이 ‘일진’이 余大男에게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될 것을 권유, 불가(佛家)에 귀의한 채 귀국의 꿈은 실현되지 않았다.

여대남은 ‘일진스님’의 도움을 받아 ‘교토(京都)’의 ‘육조강원(六條講院)’에서 수학을 하게 되는데 그곳은 일본 제일가는 불교강원이었다. 여대남은 그 후 ‘규엔지(久遠寺)’, ‘호린지(法輪寺)’에서도 수학, ‘일요(日遙)’상인이라는 불교계의 큰 별이 된다.

29세라는 젊은 나이(1609년)에 ‘혼묘지(本妙寺)’의 삼대주지(三代主持)가 되는데 이 절은 ‘구마모토(熊本)’의 중심사찰이요, 이대(2代)주지는 여대남을 출가시킨 ‘일진(日眞)스님’ 제자 ‘일요(日繞)’스님이었다. 여대남은 한 때 신변을 정리, 귀국하려 가토의 아들 ‘다다히로(忠廣)’에게 석방을 간청해 보았지만 거절당하고 편지왕래 조차 막았다는 것이다.

‘다다히로’는 2년 못 넘기고 실력자 ‘호소카와(細川上利)’에게 밀려나고 말았는데 ‘호소카와’ 역시 여대남의 간청을 불허했다고 한다. ‘호소카와’는 일본의 전 총리 ‘모리히로(細川護熙)’의 선조이다. ‘일요(日遙)’스님으로 변신한 여대남은 1659년 12월 16일 7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니 그의 유해는 ‘본묘지(本妙寺)’ 뒤편에 안장했다.

이 절에는 ‘가토’의 신사(神社)와 여대남의 묘, 그리고 ‘가토’의 회계책임자로 무역과 재정을 맡았던 ‘金?(加藤가 내려준 관명)’의 묘가 나란히 보존되어 있다. 1611년 ‘가토’가 죽자 이 절에 안치하였지만 이 절이 화재로 소실되자 다시 신축, 오늘에 이른다. 부산대학교 교무처장을 역임한 여재규(余宰奎) 교수는 여대남의 둘째 아우의 9대손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앞서 여대남이 적장 ‘가토’ 앞에서 써 바쳤다는 詩의 내용을 살펴보자.

獨上寒山石逕斜 白雲生處有人家
定車坐愛楓林晩 霜葉紅於二月花
비탈진 돌길로 높은 한산 나 홀로 올라가니
흰 구름 피어나는 곳에 외딴 집 하나 있네.
가던 길 멈추고 잠시 늦가을 단풍을 감상하니
서릿발 단풍잎이 매화보다 붉구나.

여대남이 13세 어린 나이로 위의 唐詩를 외워 썼다고 하면 그의 총명은 미뤄 짐작할 만한데 그 나이에는 소학정도일진데 그는 이미 사서를 마치고 시문학을 배울 만큼 총명했기 때문에 ‘가토’의 총애를 받았는지도 모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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