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자유의 언덕' 스틸컷. |
한국의 어학원 강사로 일하다 그곳에서 권(서영화)이라는 여자를 좋아하게 된 일본인 모리(카세 료). 고백했다가 정중하게 거절당하고 나서 2년 만에 방한해 다시 권을 찾는다.
서울 북촌의 한 게스트하우스에 터를 잡고, 권의 집에 찾아간 모리는 자신의 방한 소식을 메모지에 적어 대문에 붙여 놓는다. 그러나 1주일이 지나고 2주일이 다 돼 가도 권으로부터 아무런 소식이 없다.
그 사이, 모리는 북촌 일대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영선(문소리)과 알게 돼 점점 묘한 관계로 발전하고, 허물없이 다가오는 게스트하우스 여주인(윤여정)의 조카 상원(김의성)과 자주 술을 마신다.
홍상수 감독의 열여섯 번째 작품 '자유의 언덕'은 모리가 한국에서 경험하는 2주간의 이야기를 담았다.
전통적인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야기가 전개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영화는 독특하다. 이야기는 모리가 권에게 보낸 편지를 따라가는데, 권이 편지를 떨어뜨리면서 시간 순서가 뒤죽박죽 되기 때문이다. 인물들의 관계가 갑작스레 급진전했다가 다시 어색해져 보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모리는 "내가 아는 가장 훌륭한 여자"인 권에게 매혹돼 한국을 찾는다. 덕(德)을 동경하는 그에게 덕은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다. '시간'과 관련된 책을 끼고 사는 모리는 깨끗하고 담담한 듯 보이지만, 상대의 무례에는 취기를 빙자해 무례로 답하고 뒷담화도 서슴지 않는, 속물근성이 적당히 있는 평범한 남자다.
영화는 성적인 혹은 자잘한 복수의 욕망에 따라 갈대처럼 휘날리는 모리의 인생궤적을 따라간다. "가장 훌륭한 여자"인 권에 대한 존경과 그의 평범한 인격에서 드러나는 간극이 웃음을 전해준다.
술에 취한 채 영선과 잠자리를 가지고 나서 후회하는 모리는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맨정신에 또 반복된 실수를 저지른다. 영선의 집 화장실에서 우두커니 앉아 담배를 피우는 모리의 모습은 "생각을 해야 해"라고 끊임없이 외쳤던 '극장전'(2005·홍상수)의 주인공 동수와 닮은꼴이다.
'영원회귀'(니체)처럼 반복되는 보통 남자들(모리로 대변되는)의 실수는 과연 나아질 수 있을까. "전형적이고, 늘 되풀이 되는 역사"(부르크하르트)처럼 인간은 실수의 전형성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홍상수 감독은 존경할 만한 여성의 도움을 받으면 최소한 남자는 그럴 수 있다고 말하는 듯 보인다. 영화 막판, 모리가 권의 손을 잡고 둔덕진 언덕길을 올라가는 장면은 그래서 희망으로 가득 차 보인다. 아들 딸 낳고 잘 살았다는 구연동화 같은 마무리도 그런 희망에 한 줄기 빛을 더한다.
영화의 대사는 대부분 영어로 이뤄졌다. 카세 료의 자연스러움과 문소리의 능청, 김의성의 평범한 듯 비범한 연기가 홍상수식 동화를 더욱 풍요롭게 한다.
9월4일 개봉. 청소년관람불가. 상영시간 67분.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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